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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배우자 선택을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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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의 선택

당신이 만일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면, 과연 그 일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결정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일처럼, 여기에도 바른 방법과 잘못된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려는 자세로 진지하게 임해야 할 줄로 압니다. 결혼 문제를 마치 임상학적이거나 냉담한 태도로 무슨 결정을 내리듯이, 즉 아내를 가정부의 역할이나, 혹은 동료 정도로 생각하거나, 남편을 생활비를 벌어오는 사람쯤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남편 혹은 아내를 선택하는 문제는 여러분이 장차 살아가면서 하게 될 여러 가지 의사결정 가운데 구원문제 다음으로 중대한 것입니다.

피해야할 실수들

오늘날 세상에서의 방법은 가능한 많은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를 사귀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봄으로써, 가능한 오랜 기간 사귈 수 있는 대상이 되는지를 확정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결코 이러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남자 친구 혹은 여자 친구를 사귄다는 생각은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깨지면 더 이상 상종하지 않는 것이 그러한 불행한 사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되고, 이것은 결국 포기한 사람의 단짝이었던 본인에게 큰 비통함과 낙심에 휩싸이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의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성과의 우정관계는 쉽게 맺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애정과 감정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것은 극히 위험스럽고, 몰지각한 것이며,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무척 이기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제기간은 어떤 사람을 더 좋아할지, 혹은 거절해야 할지를 가리기 위한 샘플 테스트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결혼에 대한 진지한 결정을 하기 전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시기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외모를 따라 남자 친구, 혹은 여자 친구를 사귀거나, 혹은 한 사람을 두고 싸운 경쟁관계에서 승리한 '상'으로 여기거나, 또는 단지 자신을 과시함으로써 만족을 얻고자 하거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욕심에서 사귀는 것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결국 이미 교제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매우 악한 행동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위용을 자랑삼아 나타내고자 하는 그 어떠한 행위도 주님께 용납될 수 없습니다. 교제는 결코 여러분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쾌락을 위한 오락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정하셨기에, 반드시 존중하며, 성실히 다루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피해야 할 또다른 위험은 세상이 우리에게 쫓도록 요구하고 있는 외모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사랑에 대해 쓴 책이 많이 있고, 사랑을 주제로 한 저속한 음악을 통해 가수들이 세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세상은 결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산업이 전체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젊은 사람들은 쉽게 그들이 읽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듣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미디어 사업과 연예 사업은 비도덕적인 언어와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도록 부추기는 다양한 요소들을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의 대부분의 것은 정욕적이고, 육체적인 매력을 끌기 위한 것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인 매력이 부부 사이에 있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부분적인 요소이지, 절대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오직 육체적인 매력이라고 하는 기준 위에 세워진 관계는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는 현실적인 문제를 만나면, 곧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세상이 주는 정욕적이고, 비도덕적인 생각들을 피하십시오.

또한 불신자와 결혼하게 될 위험성에 대해서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신자와 불신자는 어떠한 형태로도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이 고린도후서 6:14절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으며, 이 구절은 결혼도 포함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이성과 함께 일할 때에도 서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위험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 여러분 자신과 그렇게 다르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여러 가지 모습 속에는 죄를 거의 짓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른 불신자와 비교해 볼 때, 표면적으로는 당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미 결혼해본 연장자인 우리가 염려하는 특별한 위험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매력이 느껴질 때, 불신자와의 결혼이 가능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단계에서 당신은 누군가가 자신과의 결혼을 내다보면서 교제를 시작하고 싶을 정도로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으로 우쭐해져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할 연령에 이르지 않았다면, 불신자의 삶이 당신의 삶보다 더 흥미롭게 생각될 위험이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크리스챤 가정에서 성장하였다면,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이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갑자기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나, 혹은 지금까지 자라온 것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쫓고자 하는 강한 유혹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이러한 사람에게서 매혹되어 있으며, 이러한 유혹이 당신을 사로잡고 있음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잠시동안 이러한 동경에 빠져있는 것은 아무런 해가 될 것이 없으며, 그러한 것들은 능히 통제할 수 있고, 너무 깊이 빠지기 전에 언제라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잠시동안 당신은 우정의 관계를 즐거워하며, 지낼 수 있습니다. 퇴근 후에 차 한잔하는 것이 무슨 해가 될까요? 아무 일도 없는데, 몇 시간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슨 잘못된 일일까요? 만일 누군가가 크리스챤으로서 마땅히 가지 못할 곳에 가자고 해서, 단 한번 가보는 것인데, 그것이 무슨 큰 일 나는 것일까요?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이미 무너져 있으며, 당신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고 있기보다는 감정이 당신을 조정하고 있는 상태에 빠져있음을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부디 이러한 상황에 이르도록 자신의 감정이 내달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것보다 더 낫고, 더 즐겁고, 더 확실한 길은 없습니다. 물론 유혹은 항상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표면적으로 불신자의 삶이 당신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으며, 특히 당신이 영적으로 좋지 않을 때, 더욱 그러합니다. 당신이 불신자와 결혼하게 되면, 당신의 신앙이나, 당신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들은 함께 나눌 수 없게 될 것이며, 영적인 삶은 가정의 평화와 화목을 지키기 위해, 또는 남편이나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제한 받거나 포기되어야 하는 실망과 낙심의 삶이 될 것이 명백합니다. 이것은 결국 좌절로 치닫게 되고, 날마다 삶에 크게 스트레스를 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삶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은 부부간에 의견의 일치를 주지 못할 것인데, 이는 당신은 성경적인 방법을 따르고자 하고,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는 세상적인 방법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로, 잘해야 당신의 의견대로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없는 방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자신의 삶의 터를 모래 위에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크리스챤은 불신자와 결혼하게 되면 결국에는 이 사람도 구원받게 될 것이 아닌가하는 기대감으로 결혼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이러한 일에 대한 아무런 약속이 없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그러한 기대가 강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말씀에 반하여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감정 사이에서 무언가를 결정해야만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옳으며, 나의 감정은 틀렸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함으로써 생기는 어려운 일들이 삼손의 삶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삼손의 삶의 초기 약속들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삼손이 블레셋 여인들에게 연정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한 결과가 사사기 14장에 나타나 있는데, 삼손이 믿음에서 탈선한 위험을 보십시오. 삼손의 탈선은 블레셋 여인을 단지 보는 것으로 시작되었고(1절), 그 다음은 그 여자와 말하였으며(7절), 마지막으로 그 여인을 취하려고 다시 갔습니다(8절). 여자를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위험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삼손이 그 여자에게서 느낀 육체적인 매력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기 부모에게 와서 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자신의 마음을 알렸던 것입니다. 삼손의 부모들은 이 결혼을 당연히 반대했지만, 삼손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오직 육체적인 매력에 의해서만 세워진 관계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단계에서 삼손이 그 여자를 본 일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후에 삼손은 그 여자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 여자와 약간의 시간을 함께 보낸 데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어 보입니다. 이 일은 정말 아무런 해도 없었습니다! 삼손이 그 여자를 본 일과 또한 교제를 통해서 일어난 감정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에, 결국 삼손은 그 여자를 아내로 삼고자 하는데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삼손의 행위의 어리석음이 드러난 후에 큰 슬픔과 비애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세상과 어울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는 것은 아무런 위험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말하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것도 아무 위험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의 감정을 자극하고 자꾸 관심을 갖게 하기 때문에 위험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불신자와 결혼하게 되면, 후에 발생하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 당신의 배우자를 원망할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러한 결혼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당신은 이제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신자와 결혼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로 굳게 결심한 것입니다.

피해야 할 또다른 극단적인 실수는 크리스챤이라면 아무라도 인생의 반려자로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도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그 사람도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만큼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두 사람이 다 가정생활의 근본적인 원칙들에 대해 동의하고 있습니까? 교회 진리에 대해서도 같은 확신이 있나요?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사람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 보이는 사항들입니다만,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사항들입니다. 이는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3)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 영적인 부분은 지극히 중요하며, 이러한 사항들에 대한 합의가 없다면, 비록 두 사람이 크리스챤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관계 속에는 항상 긴장과 서로에 대한 기대가 어긋난 낙담이 지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적인 접근방법

몇 가지 함정들이 있기 때문에 이를 피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결혼 문제를 해결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적으로 우리 삶의 문제들은 진지한 기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기도 없이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하는 당신의 소원을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오십시오. 하나님의 뜻대로 당신의 남편, 혹은 아내로 허락하신 그 사람을 당신의 삶 속으로 인도해 주시도록 구하십시오. 물론 기도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기도 외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이 외적인 증거와 함께 나타나는 삶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기 종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종은 이 일을 위해 자신이 어떠한 자세로 임했으며, 그러한 태도와 자세로 인해 어떻게 합당한 여인에게로 인도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은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27절에 나타난 그 종이 한 말은 우리 삶을 위한 좋은 금언이 됩니다.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이 일은 그 종이 주님이 그를 이삭의 아내가 될 그 여자의 집, 바로 그 집에 인도하실 수 있도록 바른 길로 여행하였기 때문에 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추구함으로써 바른 길로 행하고, 이렇게 주의 뜻대로 살 때, 주께서 삶을 함께 나눌 합당한 배우자를 확실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의 교제 가운데 시간을 보내고, 여러 집회나 수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게 되면, 당신에게 합당한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더욱 많아집니다. 그 반대로 신자들과의 만남이 적고, 자신의 기호를 따라 세상과의 접촉이 많게 되면, 놀랄 필요도 없이, 당신이 정말 교제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창세기 24장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아브라함의 종은 주님이 그를 인도하시는 길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만일 주님께 당신의 삶 가운데 합당한 배우자를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다면, 주님이 인정하실 수 없는 장소에서 그 배우자를 만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좀 나이 많은 신자라면, 젊은 신자들이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해 주는 일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린 가정을 통한 접대나 청년 형제·자매들이 참여할 수 있는 집회는 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위해 유익한 것입니다. 이 일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읽고 묵상할 수 없는 가정에서 온 사람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젊은 신자들이 서로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십시오. 우리는 중종 젊은 사람들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를 듣지만, 슬프게도 이러한 일은 그들이 교제할 수 있도록 가정을 열어 교제의 장을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의 관심에 귀를 기울여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서로에 대해 충분히 알기 전까지는 급히 서둘러 행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육체적인 매력만으로는 결혼을 위한 바른 기준이 못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사람에게 영적인 매력도 있습니까? 동일한 영적인 목표와 열망이 있음을 확인했습니까? 서로에 대해 어떤 약속이나 헌신을 하기 전에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서로에 대해 잘 알아보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서 삶의 경험을 많이 배운, 보다 나이 많은 사람과 같은 신중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물론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일지라도 그 속에 참된 영적인 열망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당신이 존경하고 칭송해 마지않는 영적인 자질들을 살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지,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지, 주님을 섬기고, 또 지역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여하기를 분명히 좋아하는지 등은 모두가 다 추천할 만한 자질들입니다. 당신이 만일 이러한 영적인 열망들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사람과 사귀고 싶어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그러한 자질들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좋은 자질들이 퇴색되는 일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금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에 의심이 든다면, 의자 위에 서서, 친구에게 손을 잡고 끌어내려 달라고 부탁해보고, 당신은 그를 끌어 올려보는 겁니다. 당신은 친구가 당신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끌어올리기보다는 끌어내리는 일이 훨씬 쉬운 법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 문제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구주로 알게 되면, 이러한 것들은 덜 중요한 것이지만, 고려해야 할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이 두 사람이 서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요소들을 신중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물론 사랑으로 그 어떠한 형태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만, 잠재된 문제들을 간과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입니다. 커다란 문화적인 차이들이 있을 때, 각자의 삶의 방식을 기꺼이 조정할 용의가 있습니까? 경제적인 능력에 큰 차이가 있을 때, 정직하게 이 문제를 대면해서,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해낼 수 있습니까?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편안한 삶에 익숙해있는 여성이 자신이 성장해온 삶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남편에 대해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요?

당신은 이것을 결혼과 크리스챤이라고 하는 주제를 다룸에 있어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살펴보는 것은 정직한 일이며, 당신이 일생이 걸린 이 문제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일 당신에게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도록 인도하셨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이 일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서로의 배경이 다른 문제로 인해 후회나 분개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됩습니다. 따라서 결혼 전에 이 문제를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위의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한 남자를 위한 한 여자를, 한 여자를 위한 한 남자를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을 때, 그 여자가 유일한 여자였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바라는 사람을 선택하고 고를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배우자 후보들을 두고 선택하는 것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으며, 물론 지금도 아닙니다. 유일한 한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는 아담에게 가장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만일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다면, 주님은 당신을 바로 그 남자, 혹은 그 여자에게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당신은 주님의 뜻이 나타나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문화적인 차이

서양 사회에서 결혼 문화는 젊은 남자, 혹은 여자들이 직접 자기 아내 혹은 남편을 찾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모들이 합당하고 유망한 남편, 혹은 아내를 고르는 일을 더 잘하고, 심지어 두 사람의 교제 가운데 개입하여 둘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는 일도 능숙하게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서양 사회의 일반적인 배경은 자신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이 결혼문제를 좌우하는 것은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문화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항에 대해 달리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또 다른 접근 방식을 보게 됩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은 오늘날 우리가 '중매 결혼'이라고 부르는 형태였습니다. 창세기 24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해 보내어졌고, 비록 아브라함이 중매 결혼을 하기를 원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찾기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 종이 합당한 여자를 찾았는데, 만일 그녀가 쫓아오고자 아니한다면, 아브라함은 그 종에게,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창 24:8)라고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그 종은 자기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그녀가 원치 않는 결혼을 강제로 하도록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종이 우물가에 도착하여 리브가를 만났을 때, 그녀의 행동을 통해 이삭의 아내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과연 리브가가 기꺼이 그 종을 쫓아가서, 이삭의 아내가 되고자 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결혼문화가 중매 결혼을 허용하고 있지만, 당사자 중 한 쪽, 혹은 양쪽이 결혼하기를 원치 않을 때, 억지로 결혼을 종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기꺼이 자기 가족을 떠나 먼 거리를 여행하였고, 이삭과 결혼했습니다. 마침내 행복한 결혼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또 다른 사례는 이삭의 아들, 야곱의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 야곱은 아내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부모의 개입이 없었습니다. 창세기 29장에는 야곱과 라헬의 사랑 이야기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며, 라헬의 아버지가 이 둘 사이에 개입하고, 속이고 하는 과정 속에서 많은 슬픔이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새겨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사는 사회의 다양한 문화적인 차이에 의해 제한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배경이 어떠하든지, 크리스챤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남편, 혹은 아내를 우리의 삶 속으로 인도하실 것을 분명히 확신하고, 기도로써 이 중요한 문제들을 주님과 함께 풀어갈 수 있습니다.


[발췌 - 야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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