禮物과 禮單의 意義(예물과 예단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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婚姻節次에 있어 실질적으로 兩家가 고민하는 절차중의 하나는 예물과 예단에 대한 준비과정과 그 物目의 選定인 것 같다. 예물과 예단의 준비에 있어 이는 兩家의 禮와 관련되기에 자칫 소홀하면 禮가 부족한 것처럼 비춰질까봐 걱정스럽고 넉넉하게 준비하자니 經濟的으로 많은 負擔이 되어 좋은 인연을 맺는 경사스러운 혼례 잔치에 걸림돌이 될까 심히 걱정스럽다. 그러나 예물과 예단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갖고 있다면 이는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닌데 많은 이들이 그 뜻과 정성을 모르는 가운데 일부 상인들의 상업적 이유만을 쫓아 그 뜻이 변질되고 있으니 예물과 예단에 대한 바른 이해를 구해 보기로 하자. 1. 예물과 함 우리 민족의 婚禮風俗에서 예물(대장함)을 女家에 드리는 풍습은 매우 오래된 것으로서 이 풍습은 남녀가 혼인할 것을 물증으로 약속하는 데에서 유래된다.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대 삼국시대부터 아끼던 물품을 가지고 혼인을 약속하는 풍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대에는 조선시대와 같이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예물이 아니라 단순하고 간단한 증표의 교환으로써 예물이었다. 그런데 이 예물 풍습이 15, 16세기에 주자가례가 조선에 유입되어 납폐가 혼례절차의 중요한 절차가 되면서 일부 부유층에서 비싼 물품을 많이 넣어 보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대장함이 사치해지기 시작하였다. 사실 朱子家禮에서 얘기하는 納幣의 뜻은 "여자 집에서 남자 집의 청혼을 허락해 준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성의와 예를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인데, 禮書에 이르기를 "신랑집에서 신부를 예로써 대하지 않으면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 여가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 그 본뜻이라 하겠다. 그 후 古代의 禮物風俗은 朱子家禮의 納幣節次로 발전되어 혼인에 있어 함을 드리는 것이 중요한 혼례절차로 자리잡았고, 이조 중기 이후는 전통적 신분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등장하는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계층들이 신분의 과시를 위해 경쟁적으로 호화 예물을 사치스럽게 보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납폐, 즉 예물이 사치스러워 지는 것은 이조 중기 이후 후대의 신부유층이 신분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발생된 폐습인데, 점차 전사회적 혼례풍속이 되어버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납폐의 수량과 품질을 등급에 따라 규정하고 그것을 위반하는 자를 처벌하였으며 관가에서는 납폐하는 날에 사람을 파견하여 실물을 검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관리의 눈을 피해 함을 미리 몰래 보내기도 하였으니 오늘날 함이 결혼 전 밤에 가는 풍습의 기원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傳統民間婚禮風俗에서는 예물과 함을 구분하여 보내기도 하였는데, 전통민간 혼례절차 중 許婚의 개념인 女家쪽의 擇日 결정 후에 男家에서 감사의 예물을 보내고 혼례식 당일 納幣書와 함께 대장함을 별도로 보내었다. 그래서 오늘날 예물과 함의 폐백이 각각 별개의 절차로 구분되어 존재함은 傳統俗禮의 혼례 풍습이며, 별도의 예물 전달 과정이 생략된 채 納幣때 함에 넣어 함께 보내는 것은 주자가례에 따른 士大夫家의 풍습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겠다. 결국, 지나치게 많은 예물을 보내는 것도 女家에 負擔을 지우는 것이니 缺禮라 하겠고 요즘 젊은이들이 경제적 이유를 들어 예물을 생략함도 혼인의 대사를 소홀히 여기는 無禮함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예물은 본인들의 사랑의 증표로서 소중함이 깃들고 평생 신부를 존중하고 사랑하겠다는 마음이 담겨, 바른 禮로써 오늘날 가정생활에 도움이 되는 물품으로 전달하면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2. 예장과 예단 혼인을 위해 오늘날에는 新婦측에서 婚需品과 禮緞을 준비하는데 이를 옛날에는 禮粧과 禮單이라고 하였다. 예장이란 여자가 시집을 올 때 생활에 필요한 의복류와 가구 및 생필품을 준비해 오는 것을 말하며 자장(資粧)또는 치장(置粧)이라 한다. 그리고 시부모와 시가의 일가 친척에게 드리는 옷 견지를 禮緞이라 한다. 최근에는 과다한 혼수품과 예단이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하는데 이는 예장과 예단의 뜻과 유례를 모르는데서 빚어지는 잘못된 풍습이며 文中子의 말을 빌리면 "시집가고 장가드는데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도"라고 하였을 정도로 대단히 무례한 경우라 하겠다. 사실, 우리나라의 혼례풍속은 서양이나 중국의 풍속과 달리 여자가 남자집으로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 집으로 장가를 가서 자식을 낳고 오랜 기간동안 생활하다가 자식이 장성한 후에 시가로 돌아가는 男歸女家 昏俗으로 이는 여자의 경제적 곤란을 덜고 신부를 예와 봉사로써 대한 대단히 높은 차원의 혼례 미풍양속이다. " <世宗實錄> 卷50, 世宗12年 6月"에 보면 김종서가 말하길, "우리나라의 풍속에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드는 것이 이미 오래된 풍습이다. 그런데 지금 만약 여자가 남자집으로 시집간다면 몸종, 의복, 가정집기물을 모두 여자가 장만하여야 하므로 그것이 어렵기에 꺼려한다. 만약 남자집이 부유하면 신부를 맞아들이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빈곤한 집에서는 이를 지탱하기 어려워서 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남자집에서도 역시 이것을 꺼린다"고 하였다. 즉, 李朝 初期 中國 朱子家禮의 親迎論에 근거한 결혼풍속에 따라 여자가 바로 남자 집으로 시집을 오는 경우에는 예장(혼수품)과 예물에 대한 부담을 지우지 않고 상당수의 예장을 남자 집에서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여자가 혼수품과 예단을 준비하는 풍습은 과연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傳來 婚俗인 男歸女家婚의 遺習이다.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와서 오랜기간동안 살면서 신랑신부가 처가에서 함께 이룩한 재산들을 후에 시집으로 들어갈 때 함께 갖고 갔던 것이 바로 오늘날의 혼수품의 발단이기에 결국 혼수품의 장만은 남자의 경제 활동에 의해 준비되었던 것이며, 경제력이 없는 여자에게 부담지우는 禮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禮緞은 혼인을 함에 있어 擇日 후 많은 禮物과 納幣때 幣帛을 보내준 데 대한 答禮와 어른에 대한 인사의 禮로써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가 이조 중기와 후기를 거쳐 男歸女家婚이 半親迎婚으로 변화되고 오늘날 실질적 親迎婚이 되면서 그 뜻과 과정은 무시된 채 혼수품과 예단에 대한 부족한 지식으로 전통문화를 쫓다보니 현재와 같이 여자집에서 과중하게 전부 장만해야 하는 出處不明의 婚禮文化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여자집이 남자집에 비해 家勢가 기울거나 인물이 부족하여 이를 만회하기 위해 많은 예장과 예단을 준비했던 이조 후기 폐습이 남아 현대에도 따르고 있으니, 결국, 많은 혼수품과 예단은 스스로 집안이 미천하고 신부가 부족함을 알리는 징표라고 하겠기에 양가 모두가 경계하여 준비할 부분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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